휴먼시티수원 - 수원시 장안구 suwon jangan-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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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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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동은 면적 1.25㎢, 가구 7,945호, 인구 23,702명, 통수 38개통으로 영화동 지역을 관할하는 동이다.
본래 영화동은 화성군 일왕면에 속해 있었는데 1931년 수원읍 영화정(町)으로 편입되었다.

1949년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연무동을 합병하였다가, 1954년 수원시 훈령에 따라 영화동과 연무동으로 분리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후 영화동과 연무동은 재합병되었다가 1962년 다시 연무동을 분리시키는 한편 조원리·송죽리를 편입하였다가 1979년 조원동·송죽동을 분리시켰다. 영화동은 교통의 요지로 국도를 비롯한 산업도로가 남북을 가로지르며 북문 시외버스 터미널이 소재하는 등 수원시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영화동은 전형적인 도시지역 거주지로서 중위권 주민들이 많이 생활하고 있으며 수원시의 북동부 중심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관길야(觀吉野)
관길야는 장안문 못 미쳐 영화동 동북쪽 넓은 들을 지칭하는데, 예전엔 흔히 '광교뜰'이라 고 불렀다고 한다.『정조실록』에 따르면 1796년(정조 20)에 '정 자(亭子)를 영화(迎華)라 하고 들[野]을 관 길(觀吉), 벌판[坪]을 대유(大有), 도 랑[渠]을 만석(萬石)이라 이름짓고 비석을 세우도록'한 것에서 유래한 다. 예전 엔 영화역으로부터 100여 보 남짓 떨어진 도로 동편에'觀吉野(관길야)'라고 새 겨진 표석이 있었다 고 한다. 장안문으로부터는 30보쯤 떨어진 지점이다.
물방아골
물방아골은 광교 저수지 아래 수원천의 첫 번째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는 지점 이다. 옛날 이 곳 에는 물방아가 있어 곡식을 찧어 먹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흔적 도 없다.
사직단(社稷壇)
사직단은 현재 국립 보훈원 안에 있는 산 꼭대기에 있었다. 예전엔 가뭄이 심 하게 들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가을철에도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기우제를 지냈던 곳은 이 곳 말고 용지와 광교산 문암골에도 있 었다.
새 수막 거리·새 술막 거리
새 수막 거리는 장안문 밖 옛 국도를 따라 수성 중학교 입구에 이르는 거리 이 름이다. 1795년(정조 19) 화성직로발참(華城直路撥站)으로 길의 혁명이 일어나 거둥길(임금 행차 길)이 지지 현(遲遲峴:지지대 고개)에서 대유평, 영화역, 관길 야, 장안문으로 바뀌고, 이어 영화역과 장용외영의 훈련장 이 들어서자 장안문 밖 이 새로이 술집으로 흥청거리게 되었다. 새 수막 거리는'새로 술집들이 들어선 거리' 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문뜰
서문뜰은 화성의'서문밖 들', 서문(화서문)과 가까이 있는 논과 밭이라는 의 미에서 지칭되었다고 한다. 위치는 수원 상공 회의소 앞 길 건너부터 화서문 부 근까지 인데 지금은 온통 주택가로 변했다. 그러나 1970년대만 해도 논과 밭이 그대로 남아 있던 지역이었다.
역(驛)말·역마촌(驛馬村)
역말은 영화동 284-1, 2번지에 있었는데 옛 영화동 사무소 옆이다. 이 곳에는 조선 시대 정조 때부터 영화역(迎華驛)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60 년대까지만 해도 이 곳 약 500여 평에 마굿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도 옛날 역원이 설치되어 있었던 영향이 아니가 싶다. 당시의 역은 지금처럼 기 차나 전철이 다니던 곳이 아니라, 당시의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이었던 말을 빌리 거 나 말에게 먹이를 주고, 관원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하며, 관물(官物) 및 진상품(進上品) 운송의 임무를 맡던 곳이다.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1796년(정조 20) 8월 29일이다. 영화역이 설치된 이유는 『화성성역의궤』에 잘 나타나 있 다.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丙辰)년(정조 20) 가을 화 성 직로(直路)에는 역참(驛站)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空曠)하여 특히 막 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 도역(良才道驛)을 옮겨 이 곳에 창 치(創置)하고 우선 역에 속한 말과 역호(驛戶)를 이사 시켰다. 이어서 관 사 건물 을 짓고 역명을 바꾸도록 명하니 영화(迎華)라 이름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 듯이 영화역은 화성 을 축조하고 나서 장안문 밖의 공한지에 인구를 이주시키고 성의 북쪽을 막아 지키는 척후의 역할을 하기 위 해 신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이는 영화역의 책임자인 찰방을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北城:화성의 북쪽) 의 척후장(斥候將)을 겸직하게 한데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한편 화성성역의 궤 를 보면, 정조는 이보다 앞서 같은 해 8월 1일 수원부 유수 조심태(趙心泰)에 게, '화성은 바로 삼남의 요충지로서 비록 축성(築城)은 했다하더라도 허소(虛 疏)한 것은 마찬가지다. 북변은 매우 허소하기 때문에 북문 밖에다 역관(驛館) 을 설치 코자 하니 재력이 생기기를 기다려 진실로 의논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며 역관 설치를 의논토록 했다. 영화역을 운영하는 재원은 둔전(屯田) 을 두어 세를 거둠으로써 충당하고 역졸(驛卒)에 대한 우대책도 마련 했다. 영화 역의 규모는 『화성성역의궤』에 나와 있는데, '관사는 정당(正堂) 및 삼문(三 門)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內衙)는 모두 52칸'이라고 했다. 또 다른 기 록에 의하면, 영화역의 건물 규모는 40칸이나 되 었고 새로 들어온 민가의 수는 50여 호 정도였다고 한다. 이 영화역이 신설되자 정조는 '영화역 신관(新館)은 이미 매우 정치(精緻)하고 우치(郵治)를 맡은 건물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도성 (화성 안)에서 바라보면 하 나의 큰 관촌(官村)을 이루고 있다.'고 할 정도로 제 법 역촌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서구의 선진 기술이 개항과 더불어 밀려들 어 오면서 역참 제도는 전신, 전화, 철도, 도로 교통으로 전환됐다. 한편 영화 초등학교 뒷산을 마장산(馬場山), 또는 역마산(驛馬山)이라고 했 다. 이 곳에 말을 놓아 먹이던 목야(牧野)와 초지(草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다. 주민들에 따르면 마장산에서 역말까지는 마방간과 소장수들이 묵는 주막이 해방후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장안 공원(長安公園)
안문에서 성벽을 끼고 화서문까지 이어진 공원으로 영화동 349-42번지에 위 치해 있다. 면적이 39,000㎡인 이 공원은 1978년 12월에 조성이 되었다. 공원 가 운데는 서노대를 본떠 만든 화성 복원 정화 기념비가 있으며, 성벽을 따라 장안 문, 서적대, 북서포루, 북포루, 서북공심돈, 화서문 등 성 곽 부속 시설물들이 이 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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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
2016-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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