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2동은 본래 광주부 일용면 지역으로 1789년 수원부로 편입되었다. 1899년 발간된 『수원군읍지』에 '정자리(亭子里)'로 표기되어 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에 의한 수원군의 동리 명칭 및 구역변경 때 진목동, 천천동을 천천리라 하여 일형면 관할이 되었다. 1931.4.1.수원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36.10.1.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되어 일왕면이 되었다. 이 때 일왕면에 소속되었다.
해방 후인 1949년 8월 15일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이 지역은 화성군 일왕면 정자리로 개편되었다. 이후 1963.1.1.자(법률 제1175호)로 화성군 일왕면에서 수원시로 편입되었다. 이 때 파장리, 이목리, 율전리, 천천리 등과 함께 행정동인 파정동 관할이 되었다. 이후 1983.10.1. 수원시조례 제1607호에 의하여 파정동에서 분리되어 정자동이 되었다.
1990.1.1. 수원시 조례 제1607호에 의하여 정자1동과 정자2동으로 분리되었다. 1997.12.31.현재 정자1동의 면적은 2.47㎞이며, 정자2동의 면적은 1.44㎞이다.
'정자(亭子)'라는 동 이름은 이 지역에 영화정[榮華亭:일명 교구정(交龜亭)] 등의 정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대유평
대유평은 정자2동 지역으로서 지금의 수성고등학교와 수원상공회의소, 연초제조창 일 대의 넓은 뜰을 가리킨다. 대유평은 원래 조선시대 국가의 정책적 차원에서 마련된 둔전(屯田)이었다. 정조 대왕은 수원의 읍치(邑治)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화성(華城)을 쌓으 면서 수원을 자족적인 도시로 유지 하기 위해 만석거(萬石渠:조기정 방죽)와 축만 제(祝萬堤:서호) 등의 수리 시설을 축조하고 둔전을 설치 운영 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화성을 쌓던 중 극심한 가뭄이 들어 전국적인 피해를 입게 되자 화성 축성 공사를 일 시 중단하고 가뭄을 극복할 수리 시설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를 축조하기 로 했다. 이 공사는 1795년(정조 19) 1월에 시작해 5월18일 완성됐다. 만석거가 축조된 후인 1797년과 1798년 연이은 가뭄으 로 삼남 지역이 모두 큰 피해를 입었으나 수원만은 만석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정조의 권농 의지(勸農意志)로 축조된 만석거로 인해 그 아래의 땅은 비옥해졌다. 정조는 만석 거의 축조와 함께 화성 밖(북성 밖), 현재 대유평 일대의 척박한 토지를 개간, 둔전을 설치하는 공사를 시작 했다. 먼저 기존의 일반 백성들의 논 밭을 사들이고 지맥이 풀리는 봄에 땅을 깊이 파서 논과 밭을 만드는 등 개간을 하는 한편 말 5마리와 바퀴가 양쪽에 달린 수레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도 함께 건설하도록 명했는데 이 둔전은 1795년 11월에 완성됐다. 이 둔전이 대유평인데 여기에는 2만 냥이라는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고 한다. 이렇게 해서 총 109석(石) 14두락(斗落)이 마련됐다. 대유 둔전을 설치하고 경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화성을 관리하고 보수·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 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는 둔전을 교리(校吏)·군졸(軍卒)·관예(官?)에게 나누 어 주면서 2월부터 9월까지 둔전에서 농사를 짓게 했다. 정조는 장용외영을 화성에 두면서 병농(兵農)이 서로 일치하는 둔전법을 시험하려 했던 것이다. 대유평은 만석거와 함께 이런 정조의 의지가 담겨있는 뜻 깊은 들이지만 급속한 도시화의 영향으로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 흔적 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 주민 들이'대리평'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는데 북문소방파출소에서 도체육 회관 에 이르는 곳으로써 정조 때에 대유둔을 설치하고'大有坪(대유평)'이란 표석 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표석은 1m 50cm 정도 크기로서 6·25 때까지 있었는데 정찰 비행장이 생기고 새 도로를 건설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둔답
둔답은 연초제조창 건물이 있는 자리를 말한다. 둔답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예전에 이 곳이 수원부 관아 또는 장용외영(화성과 행궁을 수비하던 군대)에 딸렸던 논이었음을 말해준다. 더 정확히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대유평, 즉 대유둔 전의 일부였다고 할 수 있다.
마루뜰
마루뜰은 현재 수원 의료원이 있는 자리를 일컫는다. 이 곳 주민들은 왜 마루 뜰이란 지명 이 생겼는가 하는 유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 는 이 곳이 예전에는 약간 경사가 진 지 형, 즉 야트막한 언덕 마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마루뜰이란 경사가 약간 있는 지형에 있는 들판이라 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 전에 경지 정리가 되 고 주택과 각종 시설 물들이 들어서서'마루뜰'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원종장자리
현재의 경기도 체육 회관 자리에'농산물 원종장'이 있었다. 농산물 원종장 은 일제 시대 때부터 있었는데 조선 총독부가 여기서 농작물을 시험 재배했 다고 한다. 해방후에는 경기도에서 운영을 했고'채종장'으로도 불려졌다. 그러다가 이 주변에 아파트와 주택 단지가 들어서면서 시설은 화성군 망포리로 이전했고 그 자리엔 경기도 체육 회관이 건설 됐다
한우물ㆍ한 우물뜰
수성고 아래(남쪽 담옆)에 있는 우물로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이용하던 공동 우물이었으나, 현재는 주택들이 들어서서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한우물'이 란'큰우물'이란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우물이 있는 근처의 논과 밭을'한우 물뜰'이라고 불렀으며, 한우물의 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