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亭子)라는 동 이름은 이 지역에 영화정[迎華亭 : 일명 교구정(交龜亭)] 등의 정자가 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전하며, 정자1동은 1914년 진목동, 천천동을 천천리라하여 수원군 일형면 관할이 되었다가 1936년 일형면과 의왕면이 통합되어 일왕면에 소속, 1949년 수원읍 지역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화성국 일왕면 정자리로 개편되었다.
이후 1963년 화성군 일왕면에서 수원시로 편입되어 파장리, 이목리, 율전리, 천천리 등과 함께 파정동 관할이 되었다가 1983년 파장동과 정자동이 분동되었고, 1990년 정자1동과 정자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정자지구내 아파트 건축으로 인구가 급증하여 2003년 2월 10일자로 정자1동과 정자3동으로 다시 분동되었다.
노루 마당
노루 마당은 현재 SKC수원공장이 있는 곳으로 정자동 633번지 일대이다. 주민들은 옛날에 이 곳에 노루가 많이 뛰어 놀았기 때문에 노루 마당이라고 했다 고 말한다. 그러나 땅 이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노루'라는 지명에 다른 견해 를 갖고 있다. 즉 노루[獐]가 아니라 '넓다'라는 뜻이 변했다는 것이다. 즉 '넓다'라는 뜻의'너르'가 음의 변화로'누르'가 되어'누렇다[黃]'라는 뜻으로 간 것도 있고,'노루[獐]'가 된 것도 있으며,'널[板]'로 되었다가 '날'이 되어'날다[飛]'의 뜻으로까지 가버린 것이 있다. 따라서 이 곳의 노 루 마당도'노루가 뛰어노는 마당'이 아니라'넓은 마당', 즉 넓고 평평한 땅 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이 곳은 깊은 산중도 아니어서 노루가 많이 뛰어 놀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노루'지명이 들어 가는 곳 은 여기 말고도 광교산의 노루목이 있다. 또 전북 남원의 장항(獐項)이란 지명도 '노루목'즉'넓은 목'이란 옛 말이 변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당뿌리
당뿌리는 정자동 227-7번지로서 옛 당제 고개 남서쪽 끝 지역을 일컫는 말이 다. 현재 위치는 동남 보건 대학 남쪽 경계 근처이다.
당제(堂祭) 고개
정자동 247-1번지 일대로 바로 옆에는 동남 보건 대학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60년대 초까지 율전동(밤밭), 천 천동(샘내), 장안문(북문)으로 통하는 큰 길이었으나 옆으로 국도, 산업 도로 등 이 나면서 통행인들이 감소되다가 개발로 인해 아파트가 들어서게 됐다. 이 곳 주민들에 따르면 오래 전에 이 고개에 상여를 넣어두는 작은 상여집이 있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이 곳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
뒷내
뒷내는 SKC첨단중앙 기술연구소 남쪽 담을 타고 흐르는 조그만 내로 정자동 510번 지 일대에 있다. 뒷내라는 이름은 마을 뒷편에 흐르는 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일부는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말무덤
말무덤은 정자동 588-8번지 일대 주택가를 말한다. 이 지역은 현재 아파트 공사가 진행중이며 주민들에 따르면 그 옛날 임진왜 란 때 어느 장군이 타고 가던 말이 죽자 말을 그 곳에 묻었다 하여 말무덤이라 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말이 묻혔기 때문에 말무덤이라고 했 는지는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원 인근에는 몇 군데 말무덤이나 마총(馬塚), 또는 마하리라는 등의 말 과 관련된 지명이 있는데 대부분 말[馬]이 아니라'마 을', 또는'집단', 또는'산'이라는 뜻에서 파생된'말'임이 밝혀지고 있 기 때문이다. 특히 봉담면 마하리(馬霞里)의 산자락에 형성된 말무덤은 발굴 결 과 말[馬]이 아 니라 백제 시대 수 백 개의 고분군(古墳群)임이 밝혀져 학술적으 로 커다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따라서 말무 덤이라는 지명은 실제로 말을 묻었 을 수도 있지만 옛날의 공동 묘지나, 큰 무덤을 뜻하는 고분(古墳)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망월(望月)재
망월재는 정자동 26-1번지 일대 얕은 야산(언덕이라고 해도 무방함)을 가리킨 다. 현재 동신 아파트 뒤쪽, 동남 보건 대학에서 남동쪽에 있는 공원 용지 로서 당제 고개, 당뿌리가 모두 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이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달을보고 절을 하면서 1년의 소원을 빌거나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오래 전에는 이 곳에서 정월 대 보름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고 하는 데 줄다리기, 제기차기, 망우려 등의 민속 놀이가 행해졌다고 한다. 이 때 의 줄 다리기는 요즘 마을 운동회나 학교 운동회에서 하는 작은 줄이 아니라 아름들이 동아줄로서 여자(암 줄)와 남자(숫줄), 또는 동편과 서편으로 나누어 놀이 를 벌였다고 한다. 경기의 승부는 이의동 길마재 줄다 리기나 고색동 줄다리기의 경우처럼 언제나 여자편이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야 마을에 풍년이 들고 주민들이 무병장수(無病長壽)하게 된다고 한다. 망월재란 지명은 이 곳이 달을 보고 소원을 빌던 장소 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어린이들이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며 신나게 놀았던'망우려'를 하 던 장 소였다는 데서 망우려 고개, 망월재로 변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망우려라 는 말이'망월이여'라는 소리에서 연 유한다고 보았을 때 결국 같은 말이라 생각 된다.
못배미
정자동에 있는 망월재의 동남 대학 쪽에 있는 논이나 지금은 택지로 바뀌었 다. 못배미라는 지명 은 예전에 이 곳에 연못이 있는 논이 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목욕동(沐浴洞)·멱동
목욕동은 주민들이 멱동이라고 부르는 곳으로서 동신 아파트 자리이다. 예전에 는 이 곳이 산밑이었는데 질이 좋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서 그 물로 몸을 씻으 면 병이 나았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주민들이 이 곳에서 목욕을 하며 몸을 씻었 다고 해서 이 마을을 목욕동, 또는 멱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뫼골
뫼골은 현재 동신 1차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지역으로 정자1동 401번지 일대이 다. 옛날에는 이 곳에 밭이 있었다.
물방아 거리
물방아 거리는 정자동 179-23번지 (구)연초 제조창 뒤 만석거에서 흘러나오는 하 천과 (구)SK 케미칼 옆을 흘러 내려오는 서호천 상류의 물이 합해지는 지점에 있 었다고 한다. 이 개울물의 낙차를 이용, 물방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 부 주민들은 물방아 거리의 위치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SKC첨단중앙 기술연구소 옆 내, 즉 뒷내와 (구)SK 케미칼 옆으로 흐르는 내가 합쳐지는 지점 인 동남 보건 대학 옆 개천이라고 하는가 하면, 선경 중앙 연구소 좌우로 흘러내리다가 합쳐지는 지점이라고 각기 다른 의견 을 내놓기도 한다. 한편 율천 동 샘내 쪽에서는 연쟁이논, 물방아 거리논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위치는 (구)연초 제초장쪽에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행정 구역만 다를 뿐,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석(浮石)소
부석소는 망월재의 남쪽 기슭, 즉 연쟁이들 쪽에 있는 산밑을 가리키는 것으로 써 주민들 은 돌이 떠 있는 곳이 있어서 그렇게 불러왔다고 하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불당골
불당골은 현재 벽산블루밍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지역으로 행정상의 주소는 정자동 423-1번지 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이 곳에는 예전에 부처가 모셔진 조그만 암자 가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지금은 아파 트로 인해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복이 우물
복이 우물은 정자동 429-1번지 벽산블루밍아파트 상가가 들어서 있는 곳으로 1번 국도 옆이다. 이 우물은 현재 정자동 일대 우물 중 가장 물이 풍부 하기로 유명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인근이 논에 가뭄의 걱 정이 없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산일정(山一亭)
산일정은 정자동 487번지에 있었던 정자였으나 지금 1989년이 화재로 전소되어 없어졌다. 이 정자는 정산(亭山)이란 호를 사용하던 참봉 조세현(趙世顯, 1865년생)이란 사람이 회갑을 맞은 기념으로 사재 논 100마지기를 팔아서 지었다 고 한다. 면적은 팔작 지붕에 4칸이었는데 1925년 정월에 착공해 5월 30 일 준공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곳에서는 지역의 유지나 풍류 가객들이 자주 찾아와 놀 다 가곤 했다는데, 융 릉과 건릉에 들리던 중앙의 관리들이 들려가기도 했다고 한 다. 정자동이라는 지명은 일명 조기정 방죽, 만석 거에 있던 교구정과 영화정 때 문에 생겼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더 연구해 봐야 할 일이다.
새터말·신기(新基)
새터말은 망월재, 당제 고개가 있는 언덕에서 당뿌리 중간 쯤의 지명이다. 이 곳은 농 토가 매우 비옥했던 곳이라고 하나 지금은 개발로 인해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새터말이란 지명은 새로 생긴 마을, 터를 뜻하는 신기(新基)라고 표기하 는 사람도 있으나 사잇말, 즉 간촌(間村)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 다.
⊙ 오리뜰 : 오리뜰은 현재 정자동 633번지 SKC수원공장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원래 는 경사가 약한 산으로서 오리나무가 자생했다 하여 오리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지금도 땅속에 그 뿌리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연쟁이들
연쟁이들은 정자동 254번지 일대로서 (구)연초 제초창 뒷편이다. '연정(連汀)'이라고 표기하기도 하는데, 왜 연쟁 이, 연정이라고 부르게 됐는지는 모른다. 이 근 처에는 물의 낙차를 이용한 물레 방아가 있었고 그 곳을 물방아 거리라고 부른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있는데, 물방아 근처에는 연자매(연자방아), 즉 말이나 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식을 찧게 된 돌로 만든 큰 매가 있 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경우로 보아 혹시 이 곳에도 연자매간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되는 것이다. 아니면 인근에라도 있었을 가 능성이 있다.
연자방아가 돌아가던 연자매간이 있었던 곳이므로 연자>연쟁이>연 쟁이 들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추측해 보기란 어렵지 않다. 연정이란 표기 역시 연 쟁이를 한자식으로 표기하면서 변한 지명일 것이다.
영화정(迎華亭)
영화정은 정자동 만석거에 조성된 만석 공원에 있는 정자이다. 원래는 만석거 의 남쪽 언 덕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옛날에 없어지고 만석 공원을 조성하면서 원 래의 위치에서 동북쪽으로 약 200m를 옮겨 복원시켰다. 『화성성역의궤』에 나와 있는 영화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을묘년(1795) 가을 부터 물을 받아 호수를 베풀고 그 곳 남안(南岸) 위쪽에 하나의 정자를 세우니 맑고 깨끗한 물과 평평한 기름진 들판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여기에 올라가 바라 보는 경치는 경기와 호남을 제 마음대로 할 만한 경치이다.
정자는 대 략 8칸인 데 북쪽으로 세로로 2칸이 온돌이고, 남쪽으로 세로로 2칸은 포판인데, 3면과 온 돌 뒤쪽은 모두 퇴 를 반간씩 달고 하엽 난간으로 두르고 있다. 온돌 4면은 모두 쇄창 장자(쇄窓障子)를 들였다. 단확은 5토(土) 를 썼고 정자 서쪽에는 대문 을 내고 남쪽으로는 작은 문을 냈는데 둘레는 네모꼴 단장이다. 병진년(1796) 행 차시 영화정이란 편액을 달도록 했다(수원 유수 조심태가 글씨를 씀).'라 나와 있다. 영화정이 건립된 후 진 목정에서 행해 지던 신구 유수끼리의 교구(交龜)의식은 이 곳으로 옮겨진 듯하다. 현재의 영화정은 만석거를 공원화하면서 1996년 10월 에 건립했는데, 8칸의 평면 구조를 하고 있으며 1고주(高柱) 5량(樑), 겹처마의 팔 작집으로 익공(翼工)이 없는'ㄱ'자 형태를 갖추고 있다.
진목정(眞木亭)
진목정이 있던 자리는 정자동 295번지 쯤으로 조기정 저수지(옛이름 만석거) 옆, 경남아너스빌아파트 앞 언덕이다. 진목정이란 명칭은 참나무가 많은 곳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옛날에 수원 유수(水原留守)가 부임해 올 때 이 정자에서 신구(新 舊) 유수끼리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서로 맞추어 신원을 확인한 다음 사무를 인수 인계했다고 하여 일명 교구정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그 옆의 저수지 를 조기정 방 죽이라고 하는 것은 교구정이란 말이 전해 내려 오면서 변한 것이 다. 진목정은 『화성성역의궤』에도'장안 문을 나와 북쪽으로 5리 쯤인 지하동구 (芝下洞口) 진목정 아래에 개울을 뚝 잘라 방죽을 쌓고 만석거라 이름 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만석거가 만들어지고 남쪽 언덕에 영화정이 만들어지면서 이 정자에서 행해지는 교구(交龜) 의식은 영화정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인다.
진목현(眞木峴)·참나무 고개
정자동 295번지 경남아너스빌 아파트 앞 얕은 고개를 말한다. 옆으로는 일왕 저수지가 있다. 진목현은 참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이 곳에 진목정(眞木 亭), 또는 교구정(交龜亭) 이라고 하는 정자가 있어 신임 유수가 정자에서 전임 유수와 만나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맞추어 보고 업무를 인수 인계했다고 한다. 정자동(亭子洞)이란 지명은 이 정자가 있음으로 해서 생겼다고 하는데, 산일정에 대해 도움말을 준 주민들은 산일정때문에 정자동이란 지명이 붙여졌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효자문(孝子門)
효자문은 정자동 480번지, SKC첨단중앙 기술연구소 북동쪽에 있었다. 1823년에 태어 나 정 3품 통대부를 지냈으며 사헌부 감찰, 연일 현감 겸 병마절제도위를 지낸 조 존용(趙存庸)의 효행을 높이 사 임금이 내린 문으로 최근까지 나무 현판이 있었으나 후손이 1998년 용인시 원삼면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