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館長 朴益淳)은 1968년 북한 124군부대의 ‘1․21 청와대 기습사건’ 당시 목숨을 바쳐 적의 침투를 저지한 최규식(崔圭植) 경찰경무관을 2004년 2월의 호국인물로 선정, 발표했다.
최규식 경무관은 1931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고등학교 졸업 후 1949년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1951년 9월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제8사단 50포병대대에 관측장교로 보직된 그는 강원도 인제 노전평 전투와 백석산 전투에 참가하여 수많은 공적을 세웠고 1952년 4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 이후 1954년 도미(渡美)하여 미육군 포병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귀국 후 포병학교 사병교육대 포대장․작전과장 등을 거쳐 21사단 167포병대대 부대대장으로 재임하던 중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요원으로 선발되어 충북도경 정보과장을 거쳐 1963년 12월 전역했다.
전역후 경찰 총경으로 임용된 그는 부산시경 정보과장, 서울 용산경찰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7년부터 종로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중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폭파하고 대통령을 암살할 목적으로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1․21사태’를 맞았다. 1968년 1월 21일 밤 22시경 종로경찰서 순찰차로부터 ‘CIC대원이라는 거동수상자 30여명이 세검정에서 자하문 쪽으로 행진하고 있는데 검문에 응하지 않는다’ 는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한 최서장은 즉시 기동 타격대의 출동을 지시하고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다. 당시 공비가 침투했던 지역은 청와대와 직선거리로 3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최규식 서장은 검문에 불응하며 자신들을 훈련에서 돌아오는 CIC부대원이라고 우기는 무장공비를 가로막고 신분을 추궁하면서 체포를 지시하는 순간, 무장공비들의 선제사격을 받았다. 갑작스런 공격으로 왼쪽 가슴에 세 발의 총을 맞고도 그대로 선 채 응사하면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최서장은 결국 현장에서 쓰러졌으며 병원 이송 중 운명했다.
이후 무장공비들은 군경합동작전으로 김신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살되었다. 정부는 북한 특수부대원과 치열한 교전 끝에 청와대 진입을 막는 결정적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고인의 전공을 기려 경무관으로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동료 경찰관들은 그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가 쓰러진 청운동 자하문 고개와 경찰종합학교 교정에 동상을 건립하여 그의 투철한 사명감과 호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2월 5일(목 14:00)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는 유족과 경찰 선후배를 비롯, 경찰청장, 경찰대학장, 경우회장, 참전경찰유공자회장 등 유관단체 주요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거행된다.
자료제공 : 국방부 전쟁기념사업회 홍보실 (☏ 02-709-3036)
2월의 독립운동가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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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2.15(음)~1964.1.13)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신 김병로(金炳魯)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87년 12월 전라북도 순창에서 사간원 정언을 지낸 김상희와 장흥 고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街人)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간재 전우에 사사하였고 「중용」,「대학」에 심취하는 한편 의서와 산서(山書)까지 섭렵하였다. 선생은 러일전쟁 중 목포에 정박중인 일본군함을 보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 담양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을 배웠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된 뒤 선생은 서재를 박차고 나와 전북 태인에서 거의한 최익현 의진에 가담하였고, 의진이 해산된 뒤 순창의 김동신 의진에 참여하였다. 일제의 ‘호남대토벌작전’으로 의병투쟁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서 수학하면서 고광준․김성수․백관수․송진우 등과 교유하였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과 일본대학 법과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하였고 1912년 다시 도일하여 명치대학과 중앙대학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하였는데, 일본유학중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을 담당하는 등 민족계몽운동에도 힘썼다.
귀국 후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등에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1919년 경성지방법원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23년 선생은 권승렬․이인․허헌 등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 김상옥사건․2차 의열단사건․6․10만세사건․조선공산당사건․광주학생사건․수양동우회사건 등 많은 독립운동사건을 무료로 변론하였다. 또한 안재홍, 안창호 등 민족운동가와 관련된 사건의 변호도 맡아 그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그리고 옥구소작쟁의, 원산총파업 사건의 변론도 자진하여 담당,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실천하였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조선교육협회 창립발기인, 보성전문학교 상임이사 등을 맡았으며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분열되어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세력의 통합에도 노력,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였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현지를 방문하고 진상을 조사,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였다. 이듬해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를 이끌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1946),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대한민국 건국과 민족정기 구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자료와 사진을 2월 한달 동안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